고리키 다다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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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리키 다다후사는 1584년, 도토미국 하마마츠에서 태어난 무사로, 이와쓰키 번의 다이묘였다. 그는 세키가하라 전투, 오사카 전투 등에 참전했으며, 1619년 하마마츠 번으로, 1639년 시마바라 번으로 이봉되었다. 시마바라 번에서는 로닌들의 이주를 장려하여 지역 부흥에 힘썼으며, 나가사키의 경비를 맡아 도쿠가와 막부에 기여했다. 1655년 사망했으며, 아들 고리키 타카나가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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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키 다다후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원어 이름 | 高力 忠房 |
출생 | 1584년 |
출생지 | 하마마쓰, 일본 |
사망 | 1656년 1월 7일 |
사망지 | 에도, 일본 |
국적 | 일본 |
아버지 | 고리키 마사나가 |
친척 | 고리키 기요나가(할아버지) |
경력 | |
소속 | 도쿠가와 가문 에도 막부 |
지휘 | 이와쓰키 번 |
계급 | 다이묘 |
참여 전투 | 우에다 성 공성전 오사카 전투 시마바라의 난 |
관직 | |
관위 | 종5위 하 셋쓰국 수 |
가문 | |
씨족 | 고리키 씨 |
가족 관계 | |
부모 | 고리키 마사나가, 혼다 다다토시의 딸 |
형제 | 다다후사, 고리키 마사시게, 고리키 나가쓰구 |
배우자 | 사나다 노부유키의 딸 만 |
자녀 | 고리키 다카나가, 고리키 다카후사, 고리키 마사후사, 오가와 마사히사의 부인 |
기타 정보 | |
통칭 | 사콘다이후 |
계명 | 젠린인덴 겟신도에이다이코지 |
묘소 | 교토부무코시 몬즈메초 기타노구치의 에이쇼지 |
번주 정보 | |
이와쓰키 번 번주 (고리키 가) | 전임: (고리키 기요나가) 후임: 아오야마 다다토시 임기: 1600년 ~ 1619년 |
하마마쓰 번 번주 (고리키 가) | 전임: 미즈노 시게나카 후임: 마쓰다이라 노리나가 임기: 1619년 ~ 1638년 |
시마바라 번 번주 (고리키 가) | 전임: 마쓰쿠라 가쓰이에 후임: 고리키 다카나가 임기: 1638년 ~ 1655년 대수: 1 |
2. 생애
고리키 다다후사는 도토미국 하마마츠에서 태어나 무사시국 이와쓰키 번의 영주직을 계승받았다. 조부 고리키 키요나가에게서 자랐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전했다. 하마마츠 번과 시마바라 번의 번주를 역임하며 영지 개발과 안정에 힘썼다. 특히 시마바라의 난 이후 황폐해진 시마바라 번을 성공적으로 부흥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우에다 번의 사나다 노부유키의 딸과 결혼했으며, 아들 고리키 타카나가가 뒤를 이었다.
2. 1. 초기 생애와 이와쓰키 번
고리키 다다후사는 1584년 도토미국 하마마츠에서 무사시국 이와쓰키 번(2만 고쿠) 다이묘 고리키 마사나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 그러나 다다후사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사망했기 때문에 조부인 고리키 키요나가의 손에서 자랐다. 1599년 조부로부터 이와쓰키 번 영주직을 물려받았고,[1] 얼마 지나지 않아 도쿠가와 히데타다 군대에 합류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으나, 전투에 늦게 도착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마시타 나가모리가 다다후사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다.1609년, 이와쓰키 성이 화재로 소실되었다.[2] 1614년, 몰락한 오쿠보 타다치카로부터 아베 마사츠구에게 오다와라 번을 원활하게 이전하는 임무를 맡았다.
2. 2. 오다와라 번과 오사카 전투
1614년, 다다후사는 몰락한 오쿠보 다다치카의 오다와라 번을 아베 마사츠구에게 원활하게 이전하는 임무를 맡았다.[1]같은 해 겨울부터 오사카 겨울 전투에 도쿠가와 히데타다 군의 일원으로 참전했으며, 다음 해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도이 도시카쓰를 따라 야마토 국에서 도요토미 군과 싸웠고, 전투 후에는 잔당 토벌을 담당했다.[2] 그 공으로 1619년 하마마츠 번 3만 석으로 추가 봉토를 받고 이전되었다.[2]
2. 3. 하마마쓰 번과 시마바라 번
1619년, 다다후사는 하마마쓰 번 3만 고쿠로 전봉되었으며, 1634년까지 4만 고쿠로 수입이 증가했다.[2] 간에이 2년(1625년)과 간에이 11년(1634년)에 걸쳐 총 1만 석을 추가로 받아, 총 4만 석을 영유하게 되었다.1639년 4월, 시마바라의 난 이후 다다후사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명령에 따라 히젠국 시마바라 번 (4만 고쿠)으로 재배치되었다.[2] 이에미쓰는 다다후사를 인구가 격감한 시마바라로 이동시켜 부흥에 힘쓰게 하고, 나가사키 경비와 규슈 도자마 다이묘 감시도 맡겼다고 전해진다. 시마바라 번은 수년간의 반란과 전쟁으로 황폐해졌으나, 다다후사는 세금 면제, 생존 반란자 사면, 일본 다른 지역으로부터의 농민 이주 장려를 통해 1년 만에 이전의 생산성을 회복시켰다. 또한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와 데지마 외국 무역항의 안보를 책임졌으며, 이는 도자마 다이묘가 지배하는 규슈에서 도쿠가와 막부 안보 시스템의 중요한 요소였다.
다다후사의 로닌 이민 장려로 시마바라에는 다양한 지방 사람들이 모여들어 새로운 방언이 생겨났다고 전해진다.
2. 4. 사망
1655년 12월 11일 사망하였다. 향년 72세.[2]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고리키 마사나가 | 1558년 ~ 1599년 |
어머니 | 혼다 타다토시의 딸 | |
정실 | 만 | 사나다 노부유키의 딸 |
장남 | 고리키 타카나가 | 1605년 ~ 1677년, 정실 만과의 사이에서 출생 |
차남 | 고리키 타카후사 | 생모 불명 |
삼남 | 고리키 마사후사 | 생모 불명 |
장녀 | 오가와 마사히사의 부인, 생모 불명 |
4. 평가
고리키 다다후사는 시마바라의 난으로 황폐해진 시마바라 번을 1년 만에 복구하고, 나가사키와 데지마의 안보를 책임지는 등 뛰어난 행정 능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세금 면제, 반란자 사면, 이주 장려 등의 정책은 황폐화된 지역을 빠르게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점은 그의 통치 능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한다.
4. 1. 시마바라 번 부흥 정책
다다후사는 1639년 4월, 시마바라의 난 이후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명령에 따라 히젠국의 시마바라 번(4만 고쿠)으로 재배치되었다. 새로운 영지는 수년간의 반란과 전쟁으로 황폐해진 황무지였다. 그러나 다다후사는 세금 면제, 생존 반란자에 대한 사면,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 농민의 이주를 장려함으로써 1년 안에 이 지역을 이전의 생산성으로 회복시킬 수 있었다. 그는 또한 나가사키와 그 데지마 외국 무역항의 안보를 책임졌으며, 대부분 도자마 다이묘가 지배하는 규슈에서 도쿠가와 막부의 안보 시스템에서 중요한 요소였다.4. 2. 도쿠가와 막부에 대한 공헌
고리키 다다후사는 1599년 조부로부터 이와쓰키 번의 영주직을 물려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군대에 합류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으나, 전투에 늦게 도착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마시타 나가모리가 다다후사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다.[1]1609년, 이와쓰키 성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1614년, 다다후사는 몰락한 오쿠보 타다치카로부터 아베 마사츠구에게 오다와라 번을 원활하게 이전하는 임무를 맡았다.[1]
다다후사는 또한 오사카 전투에 참여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잔여 세력을 이끌고 야마토국으로 도주한 도이 토시카츠를 추격했다. 1619년, 그는 하마마츠 번 (3만 고쿠)으로 전봉되었으며, 1634년까지 수입이 4만 고쿠로 증가했다.[1]
1639년 4월, 시마바라의 난 이후 다다후사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명령에 따라 히젠국의 시마바라 번 (4만 고쿠)으로 재배치되었다. 새로운 영지는 수년간의 반란과 전쟁으로 황폐해진 황무지였다. 그러나 다다후사는 세금 면제, 생존 반란자에 대한 사면,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 농민의 이주를 장려함으로써 1년 안에 이 지역을 이전의 생산성으로 회복시킬 수 있었다. 그는 또한 나가사키와 그 데지마 외국 무역항의 안보를 책임졌으며, 대부분 도자마 다이묘가 지배하는 규슈에서 도쿠가와 막부의 안보 시스템에서 중요한 요소였다.[1]
5. 관련 인물
- 고리키 마사나가 : 다다후사의 아버지이다.
- 고리키 기요나가 : 다다후사의 조부이다. 다다후사가 어렸을 때 마사나가가 사망하여, 다다후사를 양육하였다.
- 도쿠가와 히데타다 : 다다후사가 합류한 군대의 지휘관이다.
- 마시타 나가모리 :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다다후사의 보살핌을 받았다.
- 오쿠보 다다치카 : 다다후사는 다다치카로부터 아베 마사츠구에게 오다와라 번을 원활하게 이전하는 임무를 맡았다.
- 도이 도시카쓰 : 오사카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잔여 세력을 이끌고 야마토국으로 도주하여, 다다후사가 그를 추격했다.
- 도쿠가와 이에미쓰 : 시마바라의 난 이후 다다후사를 시마바라 번으로 재배치한 쇼군이다.
- 사나다 노부유키 : 다다후사의 장인이다. 우에다 번의 번주였다.
- 고리키 다카나가 : 다다후사의 아들이다.
참조
[1]
서적
歴史と旅 新・藩史事典
秋田書店
1993
[2]
서적
歴史と旅 新・藩史事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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